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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발자국만 더

기대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을까

목표가 되었든 결과가 되었든 웬만하면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무언가 기대하며 사는 건 삶의 건강한 방식이 아닌 것 같다고 어릴 때부터 생각했다. 이를테면 이런 고민들이 있었다.

0살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처음으로 교회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즈음이었다. 분명 성경책에는 오직 신앙만이 인생의 목적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정작 교인들은 대부분이 신에게 뭔가를 이루어달라면서 기도하고 있었다. 좋은 학교 들어가게 해달라. 좋은 직장 들어가게 해달라. 돈을 더 많이 벌게 해달라 등등.

앞뒤가 바뀌어도 한참 바뀐 것 같았다. 신에게 이런 것들을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자세는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이 아니었다.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신앙은, 내 믿음만으로 행복할 수 있으며, 오히려 그래야만 한다는 종류의 것이었다. 신앙이야말로 '내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돈도 없고 명예도 없고 가진 게 아무것도 없을지언정 온전히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여야 했다.

비슷한 시기에 스티브 잡스의 인터뷰 영상을 처음 봤다. 영상에서 잡스는 '일 자체에서 행복을 느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일이 가져다줄 부와 명예 따위의 보상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말과 함께.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꼽았는데, 사업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기 때문에 확실하지도 않은 보상을 기대하는 마음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기 때문이라는 근거가 주를 이뤘던 걸로 기억한다.

어쨌든 결과가 아니라 과정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하나보다 하고 생각했다. 사회생활은 커녕 공부조차 제대로 안 해본 초등학생으로서는 그렇게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턱이 없었지만, 왜인지 마음에 들었던 그 말을 마치 성경구절이나 되는 양 달달 외우고 다녔다.

시간이 한참 지나 군 복무 시절, 매일 아침 2마일(3.2km)을 뛰어야 할 때가 있었다. 그때는 지금보다도 체력이 좋지 못해서 1.5마일 정도를 넘으면 헉헉대기 마련이었다. 여느 날처럼 죽을 상으로 뛰고 있는 내게 King이라는 이름의 부사관이 다가와서 조언을 해주었다. "달리기 힘들 때는 딱 열 발자국만 더 가면 끝난다고 생각하고 달려. 거기까지 가면 또 그 다음 열 발자국을 목표로 하고. 그러고 나면 또 다음 열 발자국. 그러다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있을 거야."

그리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근데 이런 건 꼼수일 뿐이고, 가장 좋은 건 달리기 자체를 좋아하게 되는 거지"라고. 이 뒷말을 듣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가 인생을 살 때도, 어떤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사실 그 과정을 즐기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쓰게 되는 꼼수에 불과하려나 싶어서. 사실은 목표가 목표여서는 안 되고, 결과가 결과여서는 안 되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어떻게 살아야 되냐는 질문에 대해 나는 꽤나 이상적인 정답을 갖고 있는 셈이다. 대상이 뭐가 되었든 뭘 기대하지 말고 그 자체를 온전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 이런 자세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이유도 분명히 있다. 결과나 목표 따위를 기대해서는 뭐가 되었든 오래 갈 수 없다는 걸 직간접적으로 많이 경험해왔다.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기대가 충족되는 경우에도 그랬다.

신에게 무언가 간절히 빌던 사람은 소원이 이루어지자 신앙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사업을 시작한 사람은 목표했던 100억을 벌고 난 뒤 우울증에 빠졌고, 좋아하는 사람과 사귀고 싶었던 사람은 막상 연애를 시작하니 차갑게 식어버렸다고도 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오래도록 변치 않고 사랑하고 싶다는 욕구만이 내게 이상을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요즈음도 계속 이러한 성찰을 하곤 한다. 나 정말로 내 신념에게, 내 꿈에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있는 거 맞나? 내 감정들 행동들 돌이켜보면 조금은 아닐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내가 생각하는 이상대로 사는 게 정말 가능하긴 한 걸까? 하는 회고들. 내 이런 이상은 어쩌면, 기대한 것들이 생각만큼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인생에 대한 자기합리화 내지는 실망하지 않기 위한 생존기제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머리 아프니 나중에 고민해보자 - 싱거운 혼잣말 내뱉으면서 생각 비우기 위해 나간 달리기에서, 나는 또 다시 숨이 차버린 나머지 앞으로 딱 열 발자국만 더 가자고 생각해버렸다.